[이형로의 고사성어로 보는 세상](123) 행단류방(杏壇流芳) 인능홍도(人能弘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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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24-10-07 12:41 조회 2 댓글 0본문
- ‘행(杏)’의 나무 논쟁…공자 학문•사상과 아무 관계없어
- 사람이 도를 넓히지, 도가 사람 넓히는 것 아냐…본말 전도 말아야
덕수궁 석어당 앞뜰의 살구나무는 몇 년 전만하더라도 나무 밑에서 하늘이 안보일 정도로 꽃과 잎이 무성했는데 이제는 성긴 가지 사이로 뭉게구름까지 보일 정도다. 식재 연도의 기록이 없어 정확한 수령은 알 수없으나, 1904년 '경운궁 대화재' 이후에 심었다해도 120살은 족히 되는 나무다. 조금 길고 짧음이 있을뿐 세상에 시간을 이기는 존재는 없다는 걸 새삼 느낀다.
살구나무라 하면 '행단(杏壇)'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공자가 살구나무(또는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학문을 닦는 곳이나 강단 등을 이르는 말이다. 장자 잡편 어부(漁父) 첫머리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유래한다.
‘孔子遊乎緇帷之林 休坐乎杏壇之上 弟子讀書 孔子弦歌鼓琴, 공자유호치유지림 휴좌호행단지상 제자독서 공자현가고금’. ‘공자가 우거진 숲속을 거닐다 '행단' 위에서 쉬고 있었다. 제자들은 글을 읽고, 공자 자신은 노래를 부르며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는 뜻이다.
행단의 행(杏)자가 가리키는 나무를 어떤 이는 살구나무라 하고, 어떤 이는 은행나무라 하여 오늘날까지 한•중•일 국적을 불문하고 시비가 끊이질 않고 있다.
현존하는 산동성 곡부현 공묘(孔廟)의 행단은 공자 생존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한나라 명제가 공자의 고택을 방문하여 기념으로 대성전(大成殿)을 세웠다. 그후(1024년) 공자 46대손 공도보(孔道輔)가 그곳은 원래 행단이 있던 자리라고 고증하여 전을 다른곳으로 옮기고 그 자리엔 전석(塼石)으로 단을 쌓고 주위에 살구나무를 심었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금(金)나라 때는 행단 위에 행정(杏亭)을 세우고 학사 당회영(黨懷英,1134~1211)이 그곳에 전서체로 행단비를 세웠다. 이후 원세조가 중수(1267), 명나라때 사각정자로 개조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청나라때 건륭의 '행단찬비(杏壇贊碑)'가 추가되었다.
그후 공자 60대손 공영조(孔永祚)가 '제행단(題杏壇)'이란 시(1445)에서 ‘獨有杏壇春意早 年年花發舊時紅(독유행단춘의조 연년화발구시홍, 특히 행단의 봄소식은 빨라 매년 예전처럼 붉은꽃 피어나네)‘이라고 읊은 이후로 중국의 대부분 시인 묵객(墨客)들은 행단의 나무는 살구나무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삼국시대 오(吳)나라 명의인 동봉(董奉, 221~264)의 사람 됨됨이와 의술의 고명함을 칭송한 '행림춘만(杏林春滿, 칼럼 41회 참고), 남송 섭소옹(葉紹翁, 1194~?)의 시에서 유래한 '홍행출장(紅杏出牆)'(칼럼 110회 참고)이란 성어와 같이 살구나무에 친숙한 감정도 한몫했을 것이다.
조선에서는 성종 때까지만 하더라도 행단의 나무는 살구나무가 당연시되었다. 그러나 중종 14년(1519) 동지성균관사로 임명된 대사성 윤탁(尹倬, 1472~1534)은 성균관 명륜당 뜰에 은행나무 두그루를 마주보게 심었다. 이를 이수광(李晬光, 1563~1628)과 장유(張維, 1587~1638) 등은 은행나무는 잘못이며 살구나무라 반박했다.
그러나 미수 허목(許穆, 1595~1682)과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등은 모두 윤탁의 주장을 따랐다. 그후 지방의 향교와 서원은 성균관을 따라 은행나무를 심게 되었다. 마침내 조선후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63)은 방대한 저서인 '오주연문장전상고'의 '행단변증설(杏壇辨證說)'에서 행단의 나무는 은행나무라며 살구나무설을 일축했다. 이후 우리나라에서 행단의 나무는 은행나무가 살구나무를 쫓아내고 자리를 잡게 되었다.
겸재 정선(鄭歚, 1676~1759)의 그림에 '행단고슬(杏壇鼓瑟)'이란 제목의 작품이 있다. 행단고슬은 은행나무 아래의 단에서 거문고를 연주한다는 뜻이다. 장자의 글과 달리 공자가 아닌 제자가 거문고를 타고 있지만, 높낮이 차이가 없는 단에서 스승과 제자들이 음악을 감상하는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우람한 은행나무 한그루는 당당하고 꼿꼿한 공자를 상징하며, 돌로 차곡차곡 쌓아 만든 단은 제자들과 나누는 대화의 주제나 그 내용이 탄탄하고 논리정연함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중국에서 발행된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와 그것을 범본(範本)으로 펴낸 조선의 공자성적도의 '행단예악'(杏壇禮樂, 공자가 행단에서 예악을 가르치다)에서는 살구나무였으나, 정선은 달리 해석하여 은행나무로 그렸다.
홍만선(1643~1715 )의 '산림경제(山林經濟)'에 의하면 2각의 은행알을 심으면 수나무, 3각의 은행알은 암나무가 된다고 하였으나 이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2014년 국립산림과학원이 '분자표지자를 이용한 은행나무 암•수나무 식별방법'으로 특허를 얻은 이후론 어린 은행나무도 암수의 구별을 할 수있게 되었다. 은행나무는 보통 식재후 약 15~30년 후에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야 암수 구별이 가능했지만, 이 방법으로 1년생 이하의 어린나무까지 암수구별이 가능하게 되었다.
사실 살구나무는 늦봄에 다량의 육질이 많은 열매를 맺느라 에너지를 쏟아붓기 때문에 한여름에는 잎이 성겨 그늘이 시원치 않다. 또한 수명이 짧아 아름드리 나무로 자라기도 어려워서 행단의 나무로는 적당치 않다. 이러니 냄새나는 열매를 맺지않는 수나무라면 행단에는 은행나무가 제격인 셈이다. 살구나무는 오래살아야 100년인데 반해 1000년까지도 사는 은행나무다.
공자는 자신이 꿈꾸었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통치자에겐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고, 바른 말로 비평하니 기득권자들은 그를 못마땅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결국 꿈을 접은 공자는 제자 양성에 심혈을 쏟아 3000여명의 인재를 길러내어 지금까지 위대한 교육자로 칭송을 받고 있다. 이런 경우를 '훌륭한 스승 밑에서 많은 걸출한 제자들이 배출된다'는 뜻의 '행단류방(杏壇流芳)', '행단분방(杏壇芬芳)'이란 성어로 표현한다.
공자와 유교를 신봉하던 조선시대에도 중국과는 달리 행단의 나무를 은행나무라 했다. 행단의 나무가 살구나무든 은행나무든 공자의 사상이나 가르침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공자도 위령공편(衛靈公篇)에서 ‘人能弘道 非道弘人(인능홍도 비도홍인,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이라고 했다. 우리의 환경과 사정(事情)에 맞춰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이형로는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대만대학 철학연구소와 교토대학 중국철학연구소에서 수학 후 대학 등에서 강의를 했다. 현재 덕수궁에서 근무하며 스스로를 '덕수궁 궁지기'라고 부른다. 저서로는 ‘궁지기가 들려주는 덕수궁 스토리’, ‘똥고집 궁지기가 들려주는 이야기’(2018년)에 이어 최근 ‘궁지기가 들려주는 꽃*나무의 별난이야기' 1권과 2권, 3권을 잇따라 펴냈으며 현재 4권을 준비중이다. 구산스님께 받은 '영봉(0峰)'과 미당 서정주 선생께 받은 '한골', 그리고 스스로 지은 '허우적(虛又寂)'이란 별명을 쓰고 있다. |
출처 : 인사이드비나(http://www.insidevi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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