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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로의 고사성어로 보는 세상(143) 창씨개명(創氏改名)과 팔굉일우(八紘一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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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25-08-25 16:20 조회 3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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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創氏改名(창씨개명) 만행을 內鮮一體(내선일체, 일본과 조선은 한몸이라는 뜻)라고 선전했지만 사실은 조선인의 정신을 말살하고 착취하기 위해 만들어 낸 구호이며, 八紘一宇는 온 천하가 한 집안이라는 뜻으로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건 구호다. 일제의 패망으로 우리 이름을 되찾은지 80주년을 맞았는데 지금 우리가 진정한 주체성을 갖고 살아가는지 의문이 든다. (사진=인터넷 캡처/이형로)
일제는 創氏改名(창씨개명) 만행을 內鮮一體(내선일체, 일본과 조선은 한몸이라는 뜻)라고 선전했지만 사실은 조선인의 정신을 말살하고 착취하기 위해 만들어 낸 구호이며, 八紘一宇는 온 천하가 한 집안이라는 뜻으로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건 구호다. 일제의 패망으로 우리 이름을 되찾은지 80주년을 맞았는데 지금 우리가 진정한 주체성을 갖고 살아가는지 의문이 든다. (사진=인터넷 캡처/이형로)

지난 겨울 눈이 제법 내린 날이었다. 궁을 한 바퀴 돌다 석조전에 가보니 화단 눈밭에 '石泉'이라는 큼직한 글자가 눈에 띄었다. 

그것을 보자 기모노를 입고 중앙청 앞에서 사진을 찍던 일본인들이 떠올랐다. 알다시피 지금은 허물어버린 중앙청은 일본강점기 총독부 건물이었다. 일본인들은 자기네 조상이 자랑스러워 그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겠지만, 그것을 지켜보던 우리들은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석조전 건축에 관여한 일본인 가운데 이시즈미(石泉)라는 사람의 후손이 와서 자랑스럽게 써놓은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니 기분이 상했다. 그래서 石泉 글자 옆에 'アホ'(아호)와 '馬鹿'(바카)이란 글자를 덧붙였다. '아호'와 '바카' 또는 '바카야로'(馬鹿野郎, 莫迦野郎)는 바보 또는 멍청이라는 뜻이다.  

일본에서 공부할 때 파친코장 아르바이트 첫날, 점장이 혹시 일본 이름이 있냐고 물었다. 없다니까 여기서 일하려면 일본 이름을 하나 짓는게 좋을거란다. 한국인인걸 손님들이 알게되면 혹시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런건 내가 감당할 수 있으니, 그냥 내 이름을 쓰겠다고 하자, 일본 이름을 쓰지 않으면 매장 이미지 운운하면서 난색을 표했다. 

그래? 그렇다면 창씨개명을 해야지. 바로 그 자리에서 지은 이름은 '이토 아호(伊藤啞壺)'였다. 이토(伊藤)는 알다시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성씨며 啞壺(아호)는 '주둥이가 막힌 병'이란 뜻이다. 일본 발음으로는 '아코'가 되지만, 필자는 우리 발음인 '아호'를 염두에 두고 지은 것이다. 점장은 "오케!"라며 빙긋이 웃었다. 내 속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애매한 웃음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단골들은 나를 부를 때 '이상'으로 부르는게 아닌가. 기껏 창씨개명까지 했건만, '이토히로부미 바보'란 이름이 무색하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바를 그만둘 때까지 '伊藤啞壺'란 이름표를 당당히 달고 근무했다. 

1939년 11월10일,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 개정의 건'(제령 제19호)과 '조선인의 씨명에 관한 건'(제령 제20호)을 공포한다.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 이다. 이로써 조선에서도 일본식 씨명제를 규정하고, 1940년 2월11일부터 8월10일까지 '씨(氏)'를 정해서 제출할 것을 명령했다. 창씨개명을 주도한 조선총독은 역대 총독중 가장 악명높은 미나미 지로(南次郞,1874~1955)였다.

그 주요 내용은, 조선식 성명제를 폐지하며 조선에서도 서양자(婿養子, 사위를 양자로 삼는 것)를 인정해 서양자는 처가의 성씨를 따르고, 이성 양자를 인정하며 양자는 양가의 성씨를 따른다는 것이다. 

일제는 창씨개명이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란 뜻의 내선일체(內鮮一體, 일제가 조선인의 정신을 말살하고 착취하기 위해 만들어 낸 구호)의 완성이라 선전했지만, 조선에 본적을 둔 조선인은 일본으로 본적으로 옮기는 것을 금지하고, 일본인도 조선으로 본적을 옮길 수 없어 한국인과 일본인의 분리•차별은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창씨개명을 강행한 이유는 사실 내선일체를 근거로 징병제를 시행하기 위해서였다. 

희망에 따라 실시하게 됐다는 창씨개명은 지지부진, 1940년 5월까지 신고 가구가 7.6%에 그쳤다. 총독부는 전가의 보도처럼 강제조칙을 시행한다. 

창씨개명을 안 하면 자녀는 입학과 진학을 할 수 없고, 학교 차원에서 거부하면 폐교 조치까지 했다. 공•사기관 취직 불허, 편지발송, 소송, 식량배급, 출생신고 등에 불이익을 가했기 때문에 대다수는 응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마감인 8월10일까지 총 320만116호로 80.3%까지 높아졌다. 나머지 19.3%도 조선총독부 직권에 의해 각자의 '성'이 일본식 '씨'로 호적부에 등재됐다. 

춘원 이광수가 창씨개명의 이유를 강변한 매일신보 1940년 1월15일자 기고문 '창씨와 나'. 이광수는 창씨개명 시행 바로 다음날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개명했는데 ‘진무천황이 즉위한 가시하라(橿原)에 있는 산이 가구야마(香久山)’라며 ‘뜻깊은 이 산 이름을 씨로 삼아 향산(香山)이라고 했다’고 의미를 밝혔다. (사진=인터넷 캡처/이형로) 

일제가 1000년 이상 내려온 조선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려 하자 조선인들의 반발은 당연해서 죽음을 불사하고 창씨개명에 항거한 이들도 있다. 

전남 곡성의 류건영(柳建永)은 미나미 총독에게 창씨개명을 반대하는 서한을 보낸 뒤 자결했다. 전북 고창의 의병출신 설진영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아이들을 퇴학시키겠다고 하자, 창씨개명을 한 뒤 조상을 볼 면목이 없다며 돌을 안고 우물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창씨개명에 모든 한국인이 부정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내선일체와 '황국식민화'에 적극 나선 이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춘원 이광수(李光洙, 1892~1950)다.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창씨개명한 그는 매일신보에 창씨개명의 변을 기고한다. 

"지금으로부터 2600년 진무천황께옵서 어즉위(御卽位)를 하신 곳이 가시하라(橿原)인데 이곳에 있는 산이 가구야마(香久山)입니다. 뜻깊은 이 산 이름을 씨로 삼아 ‘향산(香山)’이라고 한 것인데 그 밑에다 ‘광수’의 ‘광’ 자를 붙이고 ‘수’ 자는 내지(內地)식의 ‘랑’으로 고치어 ‘향산광랑’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고 시작 하루만인 2월12일 서둘러 경성부 호적계로 달려가 신청서를 제출한다. 그러니까 이광수는 네 글자 중 본래 이름은 光자 뿐으로, 충직한 일본 천황의 후손이 되었음을 선포한 것이다. 그는 그후(2월20일) 매일신보에 자신의 창씨개명 논리를 '동기', '내선일체', '편의', '결심', '정치적 영향' 등으로 나눠 조목조목 풀어 실었다. 

최초의 자유시 '불놀이'의 시인 주요한(朱曜翰, 1900~1979)은 총독부의 내선일체에 적극 호응해 일본어 시집까지 내며, 이름을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로 바꿨다. '고이치(紘一)'는 일제의 황도(皇道)정신인 '팔굉일우'(八紘一宇, 온 천하가 한 집안)에서 딴 것이다. 

반면에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하면서 일본을 향한 온갖 비웃음과 조롱, 풍자를 섞어 일본식 이름을 만든 사람들도 있다. 

어떤이는 '이누노코(犬の子)' 즉 '개자식'이란 성을 만들어 신청했다. 조선인은 성씨를 바꾸면 개새끼•소새끼가 된다는 이유에서다. 또한 '이누쿠소 구라에(犬糞食衛 견분식위)‘ 그러니까 '개똥이나 처먹어라'는 뜻의 지독한 풍자로 창씨개명한 이도 있다. 

전병하(田炳夏)라는 사람은 자신의 이름에 農(농)자를 덧붙여 '田農炳夏(전농병하)'라 지었다. 일본 발음으로 '덴노헤이카'가 되는데, 이는 天皇陛下(천황폐하)의 일본 발음인 '텐노헤이카'와 매우 흡사하다. 어떤 고등학생은 일본 천황 '히로히토(裕仁)'을 풍자해 '미치노미야 히로히토(迪宮裕仁)'로 개명하려고 신청했다가 신성모독이란 죄명으로 치도곤을 치르기도 했다.  

당시 인기를 끌던 만담가 신불출(申不出, 1905~1976)은 '축생(畜生)'을 파자(破字)하여 '구로다 규이치(玄田牛一)'라 개명했는데, 이는 일본어 욕으로 '짐승 같은 놈, 개자식'이라는 뜻의 '칙쇼'가 된다. 물론 퇴짜맞고 다시 지은 이름이 '江原野原(강원야원)'인데 일본식 발음은 '에하라 노하라'다. 우리말 '에헤라 놓아라'와 발음이 비슷해 역시 일본을 조롱하는 뜻이다. 

1945년 8월15일 일제 패망으로 일본식 씨로부터 우리의 성과 이름을 되찾았다. 창씨제도 시행 5년6개월 만이었다. 올해는 일제의 억압에서 자유를 얻은지 어언 80년이 되는 해다. 이제는 우리의 성과 이름으로 살고있지만, 우리의 진정한 주체성도 함께 찾았는지는 의문이다.

이형로는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대만대학 철학연구소와 교토대학 중국철학연구소에서 수학 후 대학 등에서 강의를 했다. 현재 덕수궁에서 근무하며 스스로를 '덕수궁 궁지기'라고 부른다. 저서로는 ‘궁지기가 들려주는 덕수궁 스토리’, ‘똥고집 궁지기가 들려주는 이야기’(2018년)에 이어 최근 ‘궁지기가 들려주는 꽃*나무의 별난이야기' 1~9권을 잇따라 펴냈으며 현재 10권을 준비중이다. 구산스님께 받은 '영봉(0峰)'과 미당 서정주 선생께 받은 '한골', 그리고 스스로 지은 '허우적(虛又寂)'이란 별명을 쓰고 있다.



출처 : 인사이드비나(http://www.insidevi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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