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로의 고사성어로 보는 세상](132)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설니홍조(雪泥鴻爪)
페이지 정보
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25-02-24 11:50 조회 74 댓글 0본문
- 눈밭의 기러기 발자국처럼 우리 인생도 무상
- 어김없이 오는 계절의 정취 느끼다가 건강하게 생 마감하는 바램


오늘도 온몸을 꽁꽁 싸매고 출퇴근이다. 입춘이 벌써 지나고 우수도 지났건만 아직 칼바람이 매섭다. 요즘 체감온도는 한겨울 못지않다. 봄이 왔다고 하나 봄 같지 않다.
80년대초 어떤 정치인이 당시 정치상황을 한시 한 구절로 비유한 후 신문타이틀로 유행하던 말이 있었다.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이다.
봄은 왔으나 봄같지 않다'란 뜻의 이 말은 당나라 측천무후 때 좌사(左史) 벼슬을 지낸 동방규(東方虯, 624~705년)가 지은 시의 한 구절이다. 시를 빨리 짓기로 유명한 그가 왕소군(王昭君, 기원전 51~기원전 15)을 주제로 지은 소군원(昭君怨; 왕소군의 원망)이란 5언절구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작품이다.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이 나지 않아)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봄이 왔어도 봄같지 않네)
自然衣帶緩(자연의대완, 저절로 허리띠가 느슨해지니)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 이는 몸매를 위해 그리된 것은 아니라네)
동방규는 이렇게 왕소군이 흉노땅에 도착한후 삭막한 풍토와 고향을 등진 상심으로 나날이 수척해져 가는 가련한 모습을 그렸다.
왕소군은 양귀비•초선•서시와 더불어 중국 4대미인으로 꼽힌다. 이들의 아름다움 정도를 비유한 수화•폐월(羞花閉月), 침어•낙안(沈魚落雁) 가운데 낙안(落雁)이 그녀의 별명이다. 그녀가 흉노의 오지로 끌려가던중 가마에서 얼굴을 내민 모습을 우연히 본 기러기떼가 그녀의 미모에 놀라 백사장에 날아 앉았다 하여 붙여졌다.
그런 미인인 왕소군이 어떻게 흉노왕의 첩으로 가게 되었을까. 툭하면 국경을 침범하는 흉노족을 회유하기 위해, 한나라 원제는 공주를 보내야 했다. 이때 원제는 궁녀를 공주로 속여 보내기로 했다. 누굴 보낼 것인가 고민하다가 그는 궁녀들의 초상화집을 가져오라 해서 쭉 훑었다. 그중 가장 못나게 그려진 왕소군을 골랐다.
원제는 화공 모연수에게 명하여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려 놓게하고 필요할 때마다 뒤적여 선택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아는 궁녀들은 궁중화가 모연수에게 뇌물을 바치고 자신들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 달라 했다. 그러나 자기 외모에 자신만만했던 왕소군은 모연수를 찾지 않았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모연수는 그녀를 가장 못나게 그려 황제에게 바쳤던 것이다.
오랑캐 땅으로 떠나는 그녀의 미모를 본 원제는 땅을 치며 후회했지만 이미 길 떠난 마차였다. 진상이 밝혀진후 모연수는 황제를 기망한 죄로 참수를 당하게 된다.

올해 칠순인 필자는 생일날 가족과 함께 조촐하게 보냈다. 예전이라면 장수했다며 고희(古稀)니 뭐니 해가면서 동네 잔치까지 벌렸겠지만, 백세시대인 요즘 떠들썩한 칠순잔치는 초대하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서로 민망하다.
어쨌거나 칠순이면 인생에서 봄은 훨씬 지난 나이다. 요즘은 누가 ‘만일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제일 하고 싶냐’고 물으면 아예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대답한다. 다시 돌아가서 뭘 어쩌란 말인가. 타고난 성질이나 성격이 바뀌지 않는 한 같은 길을 걸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가수 서유석은 '너 늙어 봤냐 난 젊어 봤단다'를 부르며 나이 먹고도 앞으로 할 일이 많다고 말한다. 그러나 윤석구(1940~ ) 시인의 ‘늙어가는 길’ 싯귀가 더 솔직하고 가슴에 와닿는다.
'아쉬워도 발자국 뒤에 새겨지는 뒷모습만은/ 노을처럼 아름답기를 소망하면서/ 황혼길을 천천히 걸어갑니다/ 꽃보다 곱다는 단풍처럼/ 해돋이 못지않은 저녁 노을처럼/ 아름답게 아름답게 걸어가고 싶습니다’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 날이 짧다는 걸 아는 시인은 인생의 남은 여정을 소박하지만 큰(?) 소망을 담아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
소동파와 그의 아우 소철은 과거시험 보러 가다 눈이 많이 내려 한적한 절집에 피신한다. 급제 후에 다시 들리니 전에 반갑게 맞아주던 선사는 이미 오간데 없다. 선사가 거처하던 방 벽에는 그가 남긴 시가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를 보고 인생이란 무엇인가 묻는 아우에게 소동파는 이렇게 화답한다. 다음은 7언절구의 두 구절이다.
應似飛鴻踏雪泥 泥上偶然留指爪(응사비홍답설니 니상우연류지조, 기러기가 눈밭을 밟는 것과 흡사하네/ 진흙 위에 우연히 발자국 남기지만)
이 시에서 ‘雪泥鴻爪’(설니홍조)란 말이 유래했다. 눈밭 위의 기러기 발자국이란 뜻이다. 기러기는 자취만 남기고 어디로 날아갔는지 알 수없다. 그 흔적마저도 눈이 녹으면 감쪽같이 사라진다. 눈 위의 기러기 발자국만큼 우리 인생도 무상(無常)하다.
이제 곧 봄이 오면 눈밭의 기러기 발자국은 감쪽같이 없어지고, 빈 산에 사람이 없어도 시냇물은 저절로 흐르고 꽃은 핀다. 이런 마음의 경지를 송나라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은 이렇게 읊었다.
萬里靑天 雲起雨來(만리청천 운기우래, 구만리 푸른 하늘에 구름 일고 비 내리니)
空山無人 水流花開(공산무인 수류화개, 빈 산에 사람자취 없어도 시냇물 흐르고 꽃 핀다네)
우리 나이쯤 되면 비록 선승(禪僧)은 아니더라도 꽃 피는 봄에 산속에 들어가면 이런 경지는 충분히 느낄만하다. 봄이라 해도 아직은 봄 같지 않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빈 산에 비가 내리고 시냇물이 흐르며 꽃이 핀다.
친구여, 그땐 우리 괴나리봇짐, 아니 간단한 백팩이라도 메고 아무도 없는 산에 꽃구경하러 가세나. 시냇가 바위에 앉아 물과 함께오는 산복사 꽃잎을 바라보며, 언제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 자네의 첫사랑 얘기를 듣고 싶네. 실없는 농담이라도 나누다 껄껄 크게 웃은들 누가 뭐랄 사람 없다네.
그러다 흥이 나면 가져간 술 한잔 기울이다 낮잠이나 한숨 자고 내려오면 또 어떤가. 우리네 인생의 봄은 떠나갔지만, 계절의 봄은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올 게 아닌가.
그렇게 어김없이 펼쳐지는 계절의 정취를 느끼면서 ‘返老還童’(반로환동)으로 건강하게 생을 마감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다만 필자의 반로환동이란 갈홍(葛洪, 283~343)의 신선전(神仙傳)같은 도교서적에 나오는 ‘却老之術’(각로지술, 늙는것을 물리치는 술법)처럼 늙은이가 어린아이로 변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늙어서도 젊은이와 같은 건강을 유지한다는 의미다. 여기에 더해 ‘童心未泯’(동심미민, 늙어서도 어린아이의 천진함을 잃지 않는 것)'이면 더욱 좋을 듯 하다.
| 이형로는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대만대학 철학연구소와 교토대학 중국철학연구소에서 수학 후 대학 등에서 강의를 했다. 현재 덕수궁에서 근무하며 스스로를 '덕수궁 궁지기'라고 부른다. 저서로는 ‘궁지기가 들려주는 덕수궁 스토리’, ‘똥고집 궁지기가 들려주는 이야기’(2018년)에 이어 최근 ‘궁지기가 들려주는 꽃*나무의 별난이야기' 1~9권을 잇따라 펴냈으며 현재 10권을 준비중이다. 구산스님께 받은 '영봉(0峰)'과 미당 서정주 선생께 받은 '한골', 그리고 스스로 지은 '허우적(虛又寂)'이란 별명을 쓰고 있다. |
출처 : 인사이드비나(http://www.insidevina.com)
관련링크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